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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가야, 그 설화를 따라 도자를 빚다

옛 모습 복원 정체성 찾기 수로왕은 김해 김씨의 시조 한국 최대 규모 제사 지내 세계 첫 건축도자 미술관 유명 장유 신도시로 인구 유입 경남 2대 도시로 급속 성장 김해는 고대 미스터리를 품은 경남 최대의 성장 도시다.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가야'의 신비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 알에서 태어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인도에서 건너온 그의 왕비 허왕후 등 설화적 요소가 가득하다. 가야는 기원전후부터 562년까지 600여년간 번성한 대제국이었음에도 문헌이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잊혀진 역사로 남아있다. 그러나 최근 20년간 김해는 작은 읍에서 인구 50만을 넘는 경남 2위의 대도시로 급성장하면서 가야의 모습을 하나하나 복원해 정체성 찾기에 주력하고 있다. 김해 주요 유적은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해반천 주변에 모여있다. 첫 방문지는 수로왕릉이다. "김해하면 다들 금관가야를 생각하는데, 가락국이라고 부르는 게 옳습니다. 수로왕은 나라를 세우고 대가락이라고 불렀어요. 금관이라는 지명은 신라가 가락국을 통합하면서 생긴 이름이죠." 왕릉으로 들어서며 김해시 김병오 계장이 가야를 이해하는 첫 관문으로 '대가락'에 대해 설명했다. 수로왕릉은 둘레 22m, 높이 6m다. 경주의 고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나 수로왕을 기리는 제사는 한국 최대 규모다. 수로왕은 전국 400만 김해 김씨의 시조다. "숭선제라고 하는데 무형문화재 11호에요. 대제를 지낼 때면 도지사부터 정치, 문화, 경제계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죠. 김해 김씨 종친회는 아직도 정치적 영향력이 큽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수로왕비릉이 있다. 왕릉보다 둘레는 4m, 높이는 1m 작다. "수로왕과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후와의 혼인은 한반도 최초의 국제결혼이었다고 해요. 지금 김해에 2만 명이 넘는 해외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것도 그 기원이 수로왕에서부터 시작된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설명중에 왕비릉 한쪽에서 파닥하며 고라니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상권이 신도시로 빠져나가면서 김해시내는 호젓한 도심속 공원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도심에 최근 '가야의 거리'를 조성한 것도 역사 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도로 보도블럭에 30m마다 새겨진 가야의 상징인 '태양 문양'을 따라가면 가야의 유적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수로왕릉, 수로왕비릉, 가락국 최대 생활 유적지 '봉황동 유적', 가락국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조성된 '대성동고분군박물관'을 거쳐 가야 건국신화의 유적 '구지봉'까지 오를 수 있다. 경주와 달리 김해의 유적들은 시민들의 생활터전과 울타리를 대고 있다. 왕릉터 담장 밖은 바로 주택가다. 김 계장은 "고대 문명과 현대인의 삶이 말 그대로 하나된 도시"라고 했다. 고대와 현대의 만남은 진례면의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서도 목격된다. 세계 최초의 건축도자 전문 미술관이다. 클레이아크는 흙을 뜻하는 클레이(Clay)와 건축(Architecture)을 조합했다. 건물 외벽은 5036장의 도자 타일을 붙여 장식했다. 벽 자체가 '구운 그림(Fired Painting)'이라는 뜻의 예술품이다. 한장씩 떼어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 미술관'으로도 불린다. 2006년 개관 이래 연간 10만 명이 찾고 있다. 시설은 1만 2000평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전시관, 연수관, 체험관, 수장고를 갖췄다. 클레이아크의 김진호 홍보팀장은 "특히 연수관은 세계 신진 작가들을 키우는 요람으로 운영중"이라며 "매년 10여명의 작가들을 거주하게 해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수관에서 만난 유네스코 산하 세계도자협회(IAC) 회장 자크 코프만씨는 "세계 최고 품질의 흙과 재료를 구할 수 있고, 자연과 도시가 하나된 김해는 도자 예술로서는 최적의 도시"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설화의 도시, 김해평야로만 알려졌던 김해의 고속 성장 단면은 '장유신도시'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부산의 사상공단에서 공장들이 김해로 이주하고, 창원 재개발로 사람들이 이사오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었죠. 장유도 그때 조성된 신도시에요. 행정구역상으로는 면인데, 인구가 13만 명이 넘습니다." 장유에는 대형 아웃렛이 들어서고, 최대 1만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동양최대 규모의 롯데워터파크도 세워졌다. 경남 서부산권 주거, 놀이, 쇼핑의 대도시로 거듭났다. 장유의 또 다른 명물은 율하카페거리다. 1.2km 율하천을 끼고 80여 개의 카페가 줄지어 있다. 김해시는 골목이름 만들기와 스토리텔링화로 율하카페거리 특화사업을 진행중이다. 600년 가야의 향기는 그곳에서 진한 커피향으로 끓고 있었다. 정구현 기자

2014-12-30

'사람사는 세상'에선 국민이 대통령

영화 '변호인' 흥행 여파에 세월호 참사·서거 5주기로 올해 100만명 이상 찾아 비문은 없이 비석 하나만 기념관은 군용 막사 같아 '국민이 대통령' 글귀 긴 여운 '사람사는 세상'은 멀지 않다. 김해시내에서 호젓한 시골길을 따라 30여 분이면 족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이다. 마을은 길게 늘어선 노란색 바람개비 행렬의 끝에 있다. 관광안내소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올해는 유난히 방문객이 많네요." 봉하마을의 김민정 해설사가 반갑게 맞으며 인사말을 대신했다. "연초에 영화 변호인으로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4월 세월호 참사와 5월 서거 5주기가 맞물리면서 계속 붐볐죠. 나라가 어려울수록, 삶이 힘들수록 더 많이 찾아와요." 김 해설사는 "봉하마을 방문객 숫자를 보면 민심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올해 10월까지 100만 명 이상이 찾았다고 했다. 안내소에서 걸어가다 만난 생가는 소박했다. 11평 본채에 4.5평 아래채, 헛간과 화장실이 전부다. 생가 옆 '쉼터' 너머로는 대통령 사저가 보였다. "여기 쉼터 앞에서 방문객들이 부르면 그때마다 노 전 대통령 내외 두 분이 손잡고 나오셔서 인사하셨어요. 하루에 가장 많이 나오셨을 때가 12차례였어요." 누군가 '쇼'라고 불렀던 방문객들과의 만남이었다. 김 해설가는 "난 정치는 잘 모르지만, 쇼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전거에 손녀를 태우고 들판을 달리고, 땡볕 아래 직접 농사도 짓고, 매일같이 개천 일대를 청소하셨는데 쇼라면 너무 힘든 쇼 아닌가요." 노 전 대통령이 방문객들에게 마지막 인사한 날은 2008년 12월5일이다. "내년에 날씨 좀 따뜻해지면 그때 다시 인사 나오겠습니다"했다. 그 후 5개월 뒤 2009년 5월23일 쉼터 너머 부엉이 바위에서 노 전 대통령은 생을 마감했다.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온지 1년 3개월만이었다. "국민장 때 비가 쏟아졌는데, 5km 떨어진 진영운동장에서 여기까지 조문객 줄이 이어졌어요." 당시 기사를 찾았다. 봉하마을 조문객을 대접한 밥을 짓는데 900가마가 들었다고 한다. 국밥에 들어간 콩나물은 18톤, 나눠준 생수는 500ml짜리 100만개였다. 장례를 돕는 자원봉사자는 5000명이었다. 쉼터에서 이어진 묘역은 이등변 삼각형 형태다. 작은 연못 '수반'을 꼭지점으로 헌화대, 너럭바위가 일직선에 놓여있다. 전체 묘역은 노 전 대통령을 위한 '하늘 우체통'이다. 바닥에 깔린 박석 1만5000개 한 장 한 장에 추모 메시지가 적혀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다.' 평일이었지만 헌화대에는 국화꽃들이 수북했다. 너럭바위에는 따로 비문을 새기지 않고 '대통령 노무현'만 새겼다. '한 조각, 비석 하나'를 부탁한 유언 때문이라고 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묘역을 돌아나왔다. 생가 맞은 편 '추모의 집'에서 방문길은 끝난다. 추모의 집은 대통령 기념관인데 군용 막사 같은 임시건물이다. 다른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관보다 상대적으로 초라했다. 생전에 타던 자전거와 옷, 사진 등 유품들이 전시됐다. 정면 벽은 4.4m X 3.7m 크기 전체에 노란 리본으로 만든 노 전 대통령 형상이 꾸며졌다. 리본 하나마다 추모메시지가 적혀있다. '어떻하죠. 아직도 그리운데….' 김 해설사는 안내하다가 난감할 때가 종종 있다 했다. "초등학생들이 물어요. 대통령이 왜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아직 전 모르겠어요." 추모의 집에선 두 가지가 기억에 남았다. 먼저 사법고시 합격자 발표 기사다. 1975년 3월27일자 경향신문의 단신 기사 맨 마지막에 '고졸=노무현'이라고 쓰여있다. 추모의 집내 상영관에 반복 재생되던 생전 노 전 대통령의 모습도 잔상이 오래간다. 영상에서 노 전 대통령은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다. 바탕화면에 글이 깔린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중략)…국민에게만 빚진 대통령 노무현, 국민 여러분만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추모의 집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 해설사가 봉하마을 10월 소식지를 건넸다. 표지에 적힌 노 전 대통령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말하는 시민은(중략)…적어도 자기 몫을 주장할 줄 알고 자기 몫을 넘어서 내 이웃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행동을 하는 사람이 시민이고, 그 시민 없이는 민주주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봉하마을을 떠났다. 길을 따라 늘어선 노란 바람개비들이 핑하고 돌았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201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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